떠나지 않는 여행자

떠나지 않는 여행자

떠나지 않는 여행자

여행은 좋다. 새로운 장소를 상상하면 마음이 설레고 어딘가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싶어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잘 떠나지 못한다. 공항의 복잡함도 낯선 숙소의 냄새도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압박도 모두 피곤함으로 다가온다. 마음은 떠나고 싶어 하지만 몸은 망설이고 결국 집에 남는다.

그런데 여행 가방은 다르다. 어쩐지 정이 간다.

심심할 때면 꺼내어 굴려보고 안을 정리하면서 짧은 상상을 해본다. 바퀴가 바닥을 구를 때의 그 소리도 좋고 손잡이를 당길 때 전해지는 감각도 위로가 된다. 실제로 다녀온 것도 아닌데 어딘가를 떠났던 것 같은 기분이 가슴 속에 남는다.

여행지를 고르는 것도 어렵고 짐을 싸는 것도 귀찮다.

낯선 환경에 들어가는 일은 상상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런 수고를 건너뛰고도 여행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캐리어이다. 안에 무엇을 넣든 마음이 정돈되고 방향이 생긴다. 어딘가로 향하는 듯한 가벼움이 따라온다.

이런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떠나지 않는 여행자라고 불러본다. 여행하지 않는 여행자이다. 마음은 자주 떠나지만 몸은 늘 이 자리에 머문다. 가방을 굴리는 손끝에서 시작되는 작은 상상이 어느새 긴 여정처럼 이어진다.

첫째 장비 애호형

캐리어 파우치 속옷 정리 큐브 목베개 여권 케이스까지.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이런 물건들이 단정히 정리되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가끔 꺼내어 펼쳐보고 다시 정리해 넣는 일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언젠가 쓸 일이 생길지 몰라도 꼭 필요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들이 내 안의 설렘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물건이 아니라 감정을 소유하는 일이다.

둘째 계획 상상형

항공권을 자주 검색한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어떤 일정이 좋을까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가상의 여행 일정을 짜고 식당을 찾아보고 지도를 훑는다. 문서로 정리해 저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약하지 않고 결제도 하지 않는다. 상상은 실패가 없다. 상상 안에서는 모든 것이 뜻대로 흐르고 어디에서도 지치지 않는다.

셋째 정서 대리형

지인의 여행 사진을 보면 부럽다기보다 피곤해 보인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웃는 얼굴보다 붐비는 공항과 무거운 짐이 먼저 그려진다. 그래도 공항을 배경으로 한 사진은 좋아한다. 낯선 도시보다 출국장이 더 익숙하고 애틋하게 다가온다. 유튜브에서 여행 가방을 싸는 영상을 자주 본다. 잘 개어진 옷가지들이 차곡차곡 들어가는 걸 보며 언젠가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감정을 조용히 꺼내본다.

넷째 마음 정리형

캐리어는 단순히 물건을 담는 가방이 아니다. 삶이 복잡해질 때 가방을 꺼내어 굴려보면 마음이 따라 움직인다. 안에 든 것들을 꺼내고 다시 정리하는 동안 흩어진 생각이 천천히 정돈된다. 바퀴 소리가 조용히 공간을 돌며 흘러갈 때 멈춰 있던 감정도 흐르기 시작한다. 캐리어를 정리하는 일이 곧 나를 정리하는 일이 된다.

떠나지 않고도 여행하는 방법은 또 있다.

누군가의 여행기를 읽으며 가보지 못한 도시를 마음속에 그려보기도 한다. 낯선 언어가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아직 만나지 못한 골목을 걷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영화 속 장면에 오래 멈춰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곳의 공기를 상상한다. 그렇게 나는 책장을 넘기며 국경을 넘고 화면 속 풍경을 따라 마음의 좌표를 옮긴다. 몸은 소파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늘 이동 중이다.

여행을 실제로는 떠나지 않지만 마음은 자주 떠난다.

머리는 여행을 그리워하고 가방을 매만진다. 몸은 집에 머무르지만 정신은 이미 공항 출국장을 지나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다.

떠나지 않는 여행자라는 말이 가장 알맞는 말이다.

어디론가 가지 않아도 충분히 여행할 수 있다. 상상 속에서 혹은 방 안에서 짐을 꾸리며 떠나는 그 기분은 분명히 존재한다. 캐리어를 꺼내어 굴리는 순간 여행이 시작된다.

오늘도 그런다. 떠나지 않았지만 여행 중이다. 혹시 당신도 떠나지 않는 여행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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